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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책 리뷰 서평 감상

[고양이가 세상을 바꾸다] 고양이 1,2_베르나르 베르베르 #고양이가 주인공인 소설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설

by 녕작가 2020. 12. 2.

고양이 1,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쥐의 입장에서 본 바스테드. 쥐는 이런 모습으로 달려드는 고양이와 소통하고 싶을까?

고양이인 바스테드는 고양이가 진화의 정점이라 생각하는 암고양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의 무지를 비웃곤 한다. 바스테드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른 종일 지라도 말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끊임없이 종을 가리지 않는 소통을 시도한다. 소통의 시도는 어설프기만 하다. 소통을 한답시고 자신을 무서워하는 쥐를 쫓아가며 '야옹'거리는 식이다. 그런 소통이 먹힐 리가 없다.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스스로 자만해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어느 날, 바스테드는 피타고라스라는 고양이를 만난다. 피타고라스는 과학자인 소피에 의해 키워진 고양이로, 머리에는 USB가 달린 고양이다. 이 USB 장치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하고 인간의, 세상의 지식을 흡수할 수 있다고 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바스테드는 그의 박식함에 매료된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가고, 또 자신의 무지에 부끄러워한다. 그렇다고 마냥 자괴감에 빠지진 않는다. 피타고라스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무지를 알게 된 바스테드는 끊임없이 지식을 갈망하게 된다. 바스테드는 인간과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피타고라스의 의견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소통에 대한 의지와 긍정적인 미래에 대한 희망을 끝내 지켜갔다. 소통의 기술도 점차 늘어갔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쥐들과의 일전을 앞두고 마침내는, 서커스단을 탈출한 사자 '한니발'을 설득해 내고, 꿈속에서 파트리샤라는 샤먼과의 소통에서 성공했다. 파트리샤를 통해 벵센 숲의 인간 무리들을 설득하는 데에도 성공한다. 사자는 물론이고 인간과의 소통에도 성공한 것이다. 바스테드는 소통을 통해 성공적으로 시뉴 섬에 정착할 수 있었고, '캄비세스'와의 결전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간 미래에 비관적이었던 피타고라스 역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바스테드는 종간의 소통을 통해 종을 아우르는 화합을 이끌어 냈다. 우리 인간들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렇게 매력적인 고양이가 이전에도 있었던가? 

 

종을 아우르는 소통과 화합을 상상하다. 고양이와 내가 서로 대화하는 그 날이 올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바스테드를 통해 끊임없이 지식과 소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식은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며, 의식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 점을 바스테드의 내적 성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소통의 스케일도 남다르다. 흔히 생각하는 같은 종간의 소통이 아니다. 종을 넘어선 진정한 소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통을 통해 동물들 또한 지식을 전파하고 종간의 화합을 꿈꿀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바스테드를 통해, 소통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들끼리의 화합은커녕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과의 소통마저 힘들어 보이는 현실에서 정말 종들 간의 소통과 평화로운 화합이 가능한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작가가 바스테드를 통해 '소통의 의지'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피타고라스를 통해 던진 화두는 더욱 흥미롭다. 피타고라스는 밥이 풍족한데도 굳이 적게 먹으려 하고, 바스테드의 끊임없는 애정공세에도 흔들리지 않고 금욕한다.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 그야말로 진정한 무소유를 실천하는 고양이다. 피타고라스를 통해 작가가 던진 화두를 말하기 위해, 피타고라스가 실험실에서 겪은 이야기 중 일부를 발췌한다. 

"비교 대상이 없어서 견딜만 했어. 부당한 장애물이 더 나은 삶을 가로막고 있다고 느껴야 고통의 감정도 생기는 법이니까. 그렇지 않으면 최악의 상황에도 적응하게 마련이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니까 부당함을 못 느꼈어. 내가 자연스러운 상황이니까. 케이지 밖의 세계는 내게 존재하지 않았으니까."..."가진 게 없으면 잃을 것도 없어. 내가 두려운 건 한 가지뿐이야. 소모되는 것. 그래서 금욕하는 거야.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으려고."

 

그런데 피타고라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세상(지식)을 알고, 부당함을 알고 부당한 것에 불행한 것'이 나은지, '세상의 부도덕함과 부조리들에 무지하고, 무지하게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나은지 고민해 볼 수밖에 없다. 작가는 나름의 답을 피타고라스의 변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 같다. 바스테드를 만나며 피타고라스 또한 성장한 것이다. 사랑을 나누게 됐고, 미래의 가능성을 봤으며, 세상을 바꾸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행복한 바보보다는, 배고픈 철학자가 낫다. 배고픈 사람은 허기를 채우기 위한 노력을 하면 된다. 사유하는 행동가가 되면 된다. 세상이 불합리해 불행하다면, 세상을 바꿔 행복을 쟁취하면 된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개념이 수많은 민중들의 피땀 가득한 투쟁 아래에 쟁취되었듯 말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늘 보상받지는 못 하겠지만, 올바른 지식들이 모이고, 이들의 행동이 쌓이면 세상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 믿는다.

 

바보는 행복할 지 모른다. 아니, 행복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바보의 거짓된 행복에 대한 인식은 자신만의 쾌락에서 끝난다. 철학자는 당장에 바뀌어야 할 것들에 분노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어 냈을 때, 철학자의 행복은 개인을 넘어, 그다음 세대, 그 다다음 세대에 까지 다다를 것이다. 우리가 철학자로서의 행복을 일구어내려면, 우리 주변의 부당함을 무시하거나 모른 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아는 것만 가득한 피타고라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 행동하지 않는 피타고라스보다는 행동하는 바스테드가 훨씬 낫다. 그녀는 당장에 모자라더라도 자신을 무지를 끊임없이 극복하려 노력하고 더 똑똑해지기 위해 애쓴다. 스스로 행동하며, 자신이 꿈꾸던 소통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바스테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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