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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책 리뷰 서평 감상

[서로 다른 세 명의 천재에 대한 이야기] 바람의 화원 #그림을 소재로 한 소설

by 녕작가 2020. 12. 1.

바람의 화원, 이정명

<바람의 화원>은 <뿌리 깊은 나무>로 유명한 이정명 작가의 소설이다. 

두 작품 모두 드라마화되었는데, 나는 둘 다 보지 못했다. 그나마 <바람의 화원>은 2화 정도만 봤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배우 문근영과 박신양이 열연했었는데, 비록 2화 정도만 봤지만 동양화를 그리는 화원이라는 소재가 나름 신선하게 박혔었나 보다.

우연히 마주친 <바람의 화원>을 보고, 특유의 동양적 분위기를 다시 느껴보고 싶어 졌다. 전반적으로 소설은 마치 글로 쓴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운치 있는 대사도 그렇고, 여운을 남기는 뒷 맛까지 마치 동양화의 '여백의 미'를 느끼게 한다. 실제 화가들의 그림을 소설의 곳곳에 차용한 것도 아주 좋았다. 여기에 추리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다만, 내 개인적으로는 추리 방식이 단조로운 편이라 추리물로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이 소설은 조선 후기의 두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의 이야기이다. 다만 철저한 역사적 사실에 고증한 소설은 아니고, 역사적 인물들과 일부 사실만 차용한 대체역사물이다. 이 책에서 신윤복은 여자로 등장한다. 성별을 다르게 가정하는 작가의 통 큰 상상력이란...!  

 

나는 이번 포스팅에서 책의 줄거리보다는 세 천재들을 중심으로 내가 느낀 점을 간략하게 다루어 보았다. 내가 매력을 느낀 인물은 크게 김홍도, 신윤복, 그리고 김조년이다. 화원이 되길 포기하고 색상을 만들어 동생에게 헌신하는 신영복이나, 가문의 영광에 집착하는 신한평, 관습을 거부한 정조 등도 곱씹어 볼만한 인물이나 이번 포스팅에서 다루지는 않았다.

 

1. 중용의 천재, 김홍도 

씨름, 김홍도

김홍도는 현실과 타협한 천재다. 도화서의 엄격한 양식에 실망하지만, 거기에 큰 반기를 들거나 자신의 색깔만을 고집하진 않는다. 도화서의 엄격한 양식과 자신의 예술적 감각 사이에서 타협하며 살아간다. 김홍도 본인은 타협이라기 보단 굴복을 느꼈으나 말이다. 그런 그에게 윤복이란 제자는 새로운 자극이자 영감이 되었다. 윤복은 그의 제자였으나, 이미 천재성은 그를 앞질러 있었다. 질투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열등감을 부정적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절망감에 빠지지도 않았다. 굳이 이기려 들거나 섣부르게 윤복의 양식을 따르려 하지도 않았다 (따르려 해도 제약이 있긴 하였겠지만). 색 대신 빛을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홍도는 <씨름>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완성시켜 나갔다.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결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그렇다고 색을 아예 배제한 것도 아니었다. 그간 절대로 남에게 자신의 그림을 맡기지 않던 홍도는, <춤추는 아이>의 채색에 있어 윤복의 도움을 받기는 주저하지 않았다.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색을 쓰는 데 있어 조선 최고인 윤복에게 기꺼이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야말로,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와 같은 천재였다.

 

어쭙잖게 도화서 양식을 절충해버려 망가진 천재가 자신이라면, 윤복은 어떤 양식도, 위계도 건드리지 못할 까마득한 곳에 정신의 둥지를 틀고 있었다.
... 거기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그것이 스승이 자신에게 기대려 하는 점임을 윤복은 알아차렸다. 윤복은 천천히 화구 탁자로 다가가 녹색의 안료를 덜어내 섞었다. "무동과 몇몇 악공의 옷은 녹색이 어울릴 듯합니다." 녹색 안료를 머금은 붓을 홍도는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그리고 먹이에 달려드는 솔개처럼 붓 끝을 곧추세워 그림에 달려들었다.

 

2. 자신의 색깔을 거침없이 발하는 천재, 신윤복

칼춤, 신윤복

반면, 신윤복은 현실의 부당함에 자신의 천재성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색깔을 쓰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는 도화서에서 화려한 색채를 쓰는 데 주저함이 없다. 틀에 박히고 정형화된 사군자를 그리기보단 춘화, 풍속화라고 도외시되던 여성과 민화를 그림의 중심 소재로 한다. 도화서에서 내쫓길지언정 자신만의 길을 간다.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김조년에게도 그림을 통해 자신의 반감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다. 윤복의 삶 자체가 온전한 자신과 세상 사이의 투쟁의 <칼춤>이었다.

 

 

도화서 생도 시절 윤복은 김홍도의 "그림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림은 그리움이옵니다."라 답했는데, 윤복의 그림에 늘 여자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비록 남자로 행세하고 다니되, 감출 수밖에 없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리워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정체성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다. 늘 윤복의 풍속화는 여인이 등장했으며, 그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여자로 태어났으나 여자이지 못했고, 한 아비의 딸로 태어났으나 또 다른 아비의 아들이어야 했다. 화원이고자 했으나 화원이지 못했고, 혼을 그리고자 했으나 겉모습만 그려야 했다. 세상은 완고하고 강퍅해서 여자의 몸으로는 화원이 되지 못하게 했고, 양식을 따르지 않다고 화원의 자리에서 내쫓았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상관없었다. 혼을 담은 단 한 점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거짓 없고 순수한 영혼을 화폭 위에 옮길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복수를 마친 후, 마침내 윤복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미인도'로 여성으로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여성으로서 시작하는 자신의 새로운 모습은 아직 낯설다. 진정한 윤복 자신으로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다. 

 

윤복은 붓을 들었다. 철들기 전, 숟가락보다 먼저 들었던 붓대였다. 그러나 알지 못할 낯섦과 긴장이 온몸을 감쌌다. 살짝 미열이 나는 이마에 땀이 맺혔다. 한 점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었다. 왕도, 공신도, 대가의 양반도, 돈 많은 거부도 아닌 한 여인의 초상화를. 그것은 화인으로서의 평생 권세가 보정되는 어진도 아니고, 수많은 돈이 오가는 권문의 초상도 아니었다. 돈도 권세도 명예도 가지지 못한 한 여인. 그저 한 여인이고 싶은 여인의 초상일 뿐이었다. 한 여인이 윤복의 두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것 같은, 하지만 처음 보는 듯 낯선 여인. 

 

3. 세상을 탐욕한 천재, 김조년

SBS <바람의 화원>에서 김조년으로 열연 중인 류승룡 (출처 : SBS 비디오클립 14화)

김조년은 천한 출신이었으나 장사를 통해 큰 부를 이룬 대행상이다. 뛰어난 사업 안목을 바탕으로, 맨 손에서 시작해 지겟꾼으로, 다음엔 처음엔 소로, 다음엔 말로, 후엔 마차로 부를 늘려갔다. 점차 사업을 확장해 나중엔 조선의 시전을 장악했다. 몰락한 양반의 양자로 들어가고, 양반의 딸과 결혼하면서 신분 상승까지 이루었다. 돈으로 고위 관료들을 매수해 자신의 세상을 견고히 했다. 예술에 대한 안목도 깊었다. 조선 내에서 최고의 안목이라 할 만했다. 성골에 해당하는 진짜 양반들, 심지어 도화서의 화원들보다도 그림을 보는 눈이 특출 났다. 예술에 대한 안목만큼이나 예술에 대한 소유욕도 대단했다. 처음엔 가야금을 켜는 예인인 정향을 소유하려 하였고, 윤복이 도화서에서 쫓겨나자 윤복마저 자신의 화실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막대한 부를 가졌을지언정 그들을 진정으로 소유하진 못했다. 부를 쌓았으되 덕망은 쌓지 못했고, 제 사람을 얻는 법 또한 몰랐다. 세상을 끊임없이 먹어치우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살인도 마다않는 탐욕스러운 천재였다.

 

모든 사내가 탐내는 최고의 금기와 어진 화사였던 천재 화인을 집 안으로 들였지만 그것들은 껍데기일 뿐이었다. 더부살이를 하는 주제에도 윤복은 당당했고, 안절부절못하는 쪽은 오히려 주인인 김조년이었다. 윤복을 생각하면 늘 초조하고, 불안하고, 의심해야 했다. 그 재주를 아끼지만 정향의 가슴속에 놈이 있음을 아는 이상 질투와 증오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하늘이 내린 재주와 도도한 천재성을 대할 때면 분노는 눈 녹듯 사라졌다. 김조년은 뜨거움과 차가움, 사랑과 질투, 애정과 배신감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온전히 가지지 못한 미욱한 늙은이가 자신이었다. 

 

김조년은 늘 점점 더 힘든 상대와 싸워 이기거나, 돈으로 매수하며 자신의 부를 확장시켜 왔다. 김조년에게 있어 조선은, 세상은 자신이 더 가져야 할 것으로만 보였을지 모른다. 김홍도, 신윤복을 판에 끌어들인 마지막 싸움에서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을 계획했다. 김홍도가 이기든, 신윤복이 이기든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그의 비참한 참패와는 별개로 김조년이 김홍도와 신윤복을 싸움판에 끌어들인 수완은 그야말로 탁월한 승부사라 할 만했다. 그러나 인망 없이 쌓은 재물은 존중받을 수 없었다. 어쩌면 천민 출신의 그가 지나치게 부를 축적한 탓인지도 몰랐다. 시대 또한 그의 편은 아니었다. 그가 김홍도와의 승부에서 패배하고 모든 재물을 날렸을 때, 그의 울부짖임은 유독 강렬했다. 탐욕스러운 천재의 말로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를 조롱하고 비난할 뿐 진정으로 그의 편에 선 사람은 없었다. 실로 '어느 것 하나 온전히 가지지 못한 미육한 늙은이'의 끝이었다.

 

김조년은 허탈함을 감추려는 듯 일부러 소리를 높여 크게 웃었다. 큰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웃음소리가 중문 밖으로 퍼져나갔다. 허탈하게 웃는 김조년의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다.
"눈물을 흘리시는군요." 
김조년의 웃음소리는 마침내 낄낄거리는 귀신의 울음처럼 음침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나라고 눈물이 없겠느냐."
"교활한 승냥이도 눈물을 흘리지요. 다만 슬퍼서가 아니라 배가 고파 눈물을 흘릴 뿐..... 
...
김조년은 허탈한 웃음과 함께 자신을 농락한 자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김홍도...... 신윤복...... 김홍도...... 신윤복......"
중얼거림은 곧 웃음이 되어 허물어졌고, 웃음소리는 점점 높아 갔다가 다시 흐느낌으로 잦아들었다. 그 헛헛한 웃음과 흐느낌은 한 남자가 평생을 쌓아 올린 견고한 담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뜨거운 욕망과 꿈을 버무려 쌓아 올린 거대한 벽.

 

 

4. 천재에 대하여

천재는 남들에게 인정받았을 때에야 비로소 천재라고 불리게 된다. 딱딱하고 정형화된 틀의 사군자만이 정통성 있는 그림으로 떠받들 여진 시대상에서 당대의 두 천재 김홍도와 신윤복이 그들의 천재성을 인정받은 것은 가히 축복할만한 일이다. 이들의 천재성이 그 시대의 예인들에게 순식간에 각인된 것은 이미 시대가 변화할 준비를 마쳤다는 방증일 것이다. 반면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은 그의 생전에 대부분이 팔리지 못했다. 그가 죽은 이후에야 세상은 그의 그림의 진가를 알아본 것이다. 그는 죽은 후에야 천재로 인정받았다.

 

우리 시대에도 수많은 천재들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김홍도와 같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만의 색깔을 강하게 드러내는 신윤복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누군가는 세상을 자신의 이속만 채우는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김조년으로 세상을 바라 볼 거이다. 나는 김영복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천재가 아니라, 천재의 밑거름이 될 수밖에 없는 범인이라고. 글쎄, 영복은 스스로를 범인으로 생각했지만, 비록 그림에 있어서 천재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는 색상에 있어서만큼은 조선 최고의 천재가 되었다. 윤복이 세상의 모든 색상을 그림에 표현할 있도록 말이다. 윤복의 화려한 그림의 색상은 영복이 개발한 안료로 더욱 빛났다. 

 

우리 모두가 천재일지도 모른다. 다만, 천재의 모습이 다양할 뿐이다. 그저 현실에 지나치게 자신을 맞춘 것일 수도,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지 못한 천재일지도 모른다. 

 

 

 

 

<바람의 화원>을 읽고, 천재에 대한 저만의 생각을 풀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천재란 어떤 사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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