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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책 리뷰 서평 감상

[책 리뷰][쉴틈없이 재밌으면서도 어려웠던 책] 채식주의자_한강(창비)

by 녕작가 2020. 7. 27.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채식주의자>란 책은 사실 1년 전에 읽은 책이다. 1년 전 내가 책을 읽으면서 기록해두었던 것들을 정리하면서, 읽었던 바를 다시 이 블로그를 통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채식주의자>라는  책은 언론의 보도를 통해 먼저 알게 된 책이다. 나는 맨부커 상이 뭔지도 몰랐지만, 어쨋든 뉴스보도에서는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탔다며 꽤나 크게 이슈가 되었다. 그래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내가 (뉴스에서 봐서 제목을 아는) 책이 나와 반가웠고, 그렇게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은 각기 다른 세 명의 관점에서 쓴 소설이다. 그런데, 소설이지만 '이 책 참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엄청난 몰입감에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영혜를 둘러싼 이야기는 쉴 틈없이 흥미진진하고 재밌으면서도 작가 '한강'이 독자들에게,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영혜의 정신병적인 행동 안에서 고통 받는 주위 사람들, 특히 그의 언너 인혜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할지, 영혜의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을 탓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누구의 편에서 읽어야 한단 말인가. 마치 나 스스로가 네 번째 관점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영혜를 둘러싼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고, 때로는 열정이 있고(그것이 사회적으로 옳든 그릇되든),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나는 보통은 책을 읽다보면 책 안에 이입할 수 있는 주인공이 있기 마련이고, 그 사람의 편에 서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추리해나가곤 한다. 그런데, 영혜라는 인물은 참 묘하다. 소설 속의 영혜는, 그녀의 말과 행동을 무작정 이해하기도, 비난하기도 쉽지 않았다. 왜 그렇냐고? 나는 작가가 그녀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 혹은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의 어떤 점이 '한강'이란 작가가 남김 메시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안개처럼 흩뿌였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영혜는 나에게 매우 입체적이고 연무같았다. 책이 아닌 현실에서 영혜를 만났다면, 나는 그녀에게 정신과 진료를 권했을 것 같다. 하지만, 왜인지 책 속에서 만난 영혜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이해해보고 싶었다. 나 나름대로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굴려가며 영혜를 이해해보려 애썼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이것이 맞는지는 별개로 하고.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의 중심에는 그녀가 꾸게 된 꿈이 있다. 남편이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의 원인을 물었을 때, 혹은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왜 채식주의를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꿈을 꾸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분 나쁜 꿈이든, 기분 좋은 꿈이든 그 여운은 하루를 넘기기가 쉽지 않다. 기하지만 영혜에게 매일 밤 한 결 같이 나타난 그 꿈은 생사를 넘나는 사람에게 찾아온 갑작스러운 변화의 불씨처럼, 영혜를 집어삼킨 모양이다. 왜 영혜가 갑자기 그 꿈을 꾸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녀의 위압적인 아버지에게서 억압받은 어린 시절 때문일지도, 그녀를 다치게 한 이웃집 개가 오토바이에 질질 끌려 죽어가며, 그녀를 바라본 눈동자에서 느낀 폭력의 상처와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별안간 긴 잠복기 끝에, 남편과의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영혜를 괴롭히기 시작했을까? 어쩌면 영혜를 둘러싼 혹은 영혜가 행사한 폭력에 대한 괴로움과 죄책감은 그녀 안에서 소리 없어 쌓이고 곪아가, 어느 순간에 터져버린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그녀를 안에서부터 갉아먹었을 것이다. 그녀의 무의식 안에서 썩어간 폭력에 대한 죄책감은, '자신만큼은 더 이상 이 폭력의 주체가 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와 집념의 형태로 터져 나왔다. 그렇게, 그녀는 갑자기 일체의 육식을 거부했다. 나중엔 채식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를 조금이라도 생에 붙들기 위해 강제로 주사를 놓고 튜브를 통해 음식을 투여하는 일조차 힘겨워져갔다. 그녀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 또한 타인에 대한 폭력이라도 되는 듯이, 행동조차 나무처럼 변해갔다. 정말 나무가 되려 했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 나무가 되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체의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한 영혜의 행동들은 그녀의 가족들에게 잔인한 폭력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남편에게, 부모에게, 언니에게, 그녀와 상호작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혜의 행동은 점점 나무처럼 변해갔지만, 영혜는 결코 나무가 될 수 없었다. 점점 더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찢어발겼다. 육식동물이 되어갔다. 아무 것도 안함으로써 폭력을 행사했다. 채식만을 고집하던 영혜가 정신병원에서 탈출해, 별안간 맨 입으로 살아있는 새를 뜯어먹은 장면이 있다. 그 자체로 충격적이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나는 왜 채식을 고집하던 그녀가 갑자기 새를 산 채로 뜯어먹는 모순적인 행동을 했는지, 책을 읽는 내내 의문스러웠다. 나는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녀의 이상과는 다른 그녀의 폭력성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였을 거라고 말이다. 

 

영혜가 진정으로 바라던 '비폭력'이라는 것은 가능할까? 영혜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은 그녀의 언니인 인혜다. 그녀는 결코 영혜처럼 가만히 있지 않는다. 억압적인 아버지 아래에서, 인혜는 그녀만의 해결법을 찾았다. 홀로 서울에 상경해 화장품 가게를 이루며 삶의 주체로서 살아갔다. 그녀의 남편과의 첫 대면에서, 그에게서 보이는 남루함과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결혼까지 이어졌다. 영혜의 남편, 부모, 다른 형제들마저 영혜를 버릴 때에도, 인혜만큼은 자신의 남편과 자버리기까지 한 영혜를 그냥 내버려두지 못했다. 누구보다 상처받았을 것임에도, 인혜는 열심히 아이들을 돌봤고, 가게의 손님들에게 웃으면서 다가갔으며, 일상을 살아갔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남들에게 되돌려주지 않았다. 결코 나무처럼 정적이지 않지만, 인혜야 말로 나무같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쪼고, 뜯겨져도, 늘 그 자리에서 자신을 지나가는 모든 생명에 뜨거운 태양과 쏟아지는 비를 피할 그늘을 마련해주는 게 나무 아니던가. 인혜는 영혜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나무'같은 사람이었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나를 돌이켜 본다. 혹시 나도 영혜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나를 혹은 주변을 상처 입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나만의 이상에 빠져 주변을 나몰라라 하는 것은 아닌지. 진정으로 지키고 싶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듬어 주고, 사랑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채식주의자>로부터 찾은 나만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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