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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의 이야기/일상과 생각

설민석의 역사 왜곡 사례를 통해 본 스토리와 팩트의 역학

by 녕작가 2020. 12. 24.

이전 포스팅에서 미래의 인재가 가져야 할 역량 중 하나로 '스토리'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뛰어난 스토리텔러인 설민석 강사를 그 예로 들었다. 설민석은 역사라는 지식을 남들에게 재미있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는 뛰어난 지식 전달자다. 그의 스토리에 관한 힘은 스타 인기 강사를 넘어, 각종 방송과 저술에서 활약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이 분이 안 좋은 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설민석이 진행하는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라는 방송에서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사실관계가 아예 맞지 않은 것들을 사실인양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설민석 본인에 대한 자질 문제까지 언급되는 실정이다.

(아래는 내가 설민석을 언급했던 글 링크)

 

AI와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 #미래에 필수적인 역량 6가지

올해 들어 AI와 미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못해도 10 권은 넘을 것이다. 이런 류의 책들은 다루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었다. 비슷한 의견들이 있었다. 현재의 눈부신 기술 발전에 대한 상세한

2ggulda.tistory.com

참고로 나는 방송을 보지 않았고,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기에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모른다. 다만, 설민석 본인이 유튜브에 사과 영상을 올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실관계가 틀리게 방송한 것이 맞다고 여길뿐. 

최근 역사 왜곡 문제로 이슈가 된 설민석의 사과 (출처 : 아시아경제)

어쨌든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방송의 내용이나 설민석의 역사 강사로서의 자질은 아니다.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미래의 핵심 역량인 '스토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먼저 스토리가 주목받게 된 배경을 살펴보자. 산업 혁명이 육체노동 업무의 상당 부분을 대체하는 가운데에도 전문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화이트 칼라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의 힘은 육체노동이 아닌  전문 지식, 즉 희소성 있는 '팩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5G, AI와 빅데이터, IoT 등이 중심이 되는 4차 산업으로 들어서면서 팩트의 접근성이 매우 높아졌다. 예전에는 대학에서 관련 전공을 배우고, 교과서나 논문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던 지식들이 아주 작은 노력만으로도 접근 가능해진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볼까? 여러분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내린 진단명이 '폐농양'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병이 정말 폐농양이 맞는지 펙트 체크를 하고 싶다. 어떻게 할까? 먼저, 여러분은 병원에 요구해 CT 영상 CD를 받을 수 있다.

그 뒤에 할 일도 간단하다. 영상자료를 분석해주는 AI 서비스에 내 영상을 맡기면 된다 (실제로, AI를 통해 분석해주는 외국 사이트가 있다). 그다음은? 분석 결과를 본다. 그게 끝이다. 굳이 영상의학 교과서를 펼쳐서 내 영상소견이 폐농양에 적합한지를 공부하는 과정조차 필요 없다. 이제 내 병에 대한 처방이 맞는지 알고 싶다고? 구글에 검색하면 다 나온다. (한국 진료환경의 특성으로 인해 일부 처방은 외국과 다를 수 있다) 지금은 이 정도지만, 앞으로는 팩트에 대한 문턱이 훨씬 더 낮아질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짧아진 지식 획득 경로를 보면, 예전에 농담처럼 말하던 '코끼리 냉장고에 접는 법'이 떠오를 정도다. 순서 일, 냉장고 문을 연다. 순서 이, 코끼리를 냉장고에 닫는다. 순서 삼, 냉장고 문을 닫는다.

순서 일, 영상 자료를 받는다. 순서 이, 영상 자료를 분석 프로그램을 돌린다. 순서 삼, 분석 결과를 얻는다.

예전에는 항상 요리를 해 먹어야 했다면 이제는 요리를 시켜 먹는 것과 같다. 이제는 지식도 스스로 공부해서 얻는 게 아니라 필요한 지식만 아웃소싱이 가능한 시대가 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제는 팩트보다는 팩트의 가공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바로 '스토리'이다. 쏟아지는 팩트들 속에서 팩트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해주는 지식 전달자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전문지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다. 전문 지식은 여전히 중요하다. AI와 빅데이터에 의한 '팩트'는 '결과'만을 도출하기 때문이다. 내놓은 결과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더라도, 그 근거 조차 전문 지식이기 때문에 결국은 전문 지식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든 폐농양의 예를 좀 더 들어가 보자. 내 영상자료를 분석해주는 AI 애플리케이션이 나왔다. 단돈 1만 원이면 내가 업로드한 영상을 분석해준다. 아래는 분석 결과와 그 근거라고 생각해보자 (근거 문장은 radiopedia에서 그대로 따왔다 출처). 

당신의 CXR 및 CT 영상자료는 '폐농양(lung abscess)' 소견에 부합합니다. 

 

근거는 아래와 같습니다. 

- CXR : Large pulmonary cavity with a small dependent air-fluid level within the left mid zone, in keeping with pulmonary abscess. Patchy airspace opacification more inferiorly within left lower zone. 
Scarring/atelectasis within lateral aspect of right upper zone.

- CT findings in keeping with the plain film appearances, demonstrating a large cavity within the left lower lobe, with an air-fluid level within.Relatively extensive adjacent ground-glass changes and consolidation. Further areas of ground-glass change and consolidation in both upper lobes. Small bilateral pleural effusions.

내가 폐농양이라는 건 알겠다. 예시는 영어이지만 저 근거가 영어가 아닌 한글로 쓰여있다고 해서 전문 지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진단이 맞는지 확실히 이해하려면 전문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실제 사례에서는, 진단명을 폐농양 하나만 제시하진 않을 것이다. 아마 폐농양 부합 90%, 진균종 일치 5%, 폐암 3%,... 이런 식으로 몇 가지 가능한 진단들을 제시하고 각각에 대한 근거를 언급해 줄 것이다. 결국 선택의 문제도 존재한다. 

 

팩트 사이에서 중요한 팩트를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 팩트도 저마다 가중치가 다르다. "강원도  화촌면 OO리 74세 김옥분 할머니네 한우 농가에서 오전 8시경 우량한 송아지 출산"이 사실이라도, 신문 기사 1면에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국민들이 알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팩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항생제의 부작용이 무서워 농양이 있는데도 치료하지 않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듯, 팩트의 가중치를 잘 종합하고 선택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이해를 못하면 AI가 내놓는 데이터가 정말로 맞는 소견인지, 혹은 구글에서 검색한 자료가 올바른 결과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결국 지식의 최종 확인자이자 결정권자로서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이전에 비해 그 수요는 줄겠지만 말이다. 환자가 가진 질병이 특이 케이스일수록 이런 올바른 선택지를 고르는 능력은 더욱 중요해진다. 늘 새로운 케이스는 쏟아져 나온다. 이세돌의 78 수처럼, 빅데이터가 충분히 자료를 찾지 못한 케이스에서 AI는 엉뚱한 결과를 도출할 가능성이 있다. 즉, 틀린 팩트들(거짓들) 사이에서 진짜 팩트를 찾아내는 능력이 중요하다. 이번 설민석 이슈의 핵심도 이 부분이다.

 

설민석의 역사 왜곡 논란은 '지식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스토리가 아무리 좋아도 팩트가 엉망이면 스토리는 힘을 잃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주로 활약한 수능 국사 영역에서는 지금과 같은 문제가 일어날 일이 없었다. 아마 수능 수준의 국사에서는 강사들이 하는 문제 연구 등을 통해 충분한 팩트 체크가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국사에 대한 지식은 뛰어난 입담과 만나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그런데, 자신의 잘 모르는 영역에 까지 지식 전달자로 나서면서 '팩트 체크 능력'이 중요해졌다. 물론 이 팩트 체크 조차 아웃 소싱할 수 있다. 그래도 최종 검토는 본인이 해야 한다. 스토리텔러인 당사자가 전달하는 지식이 사실인지 유언비어인지 조차 모른 채 떠든다면 앞으로 그 사람의 말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책 읽어드립니다>에서 전문가의 부재는 아쉬웠다 (출처 : 네이버포스트)

예전에 <책 읽어드립니다>의 <삼국지 편> 일부를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다. 일부 클립 영상만 봤지만, 보면서 참 어색하게 느껴졌었다. 패널 중에 전문가는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패널 중에 내가 몰랐던 전문가가 있었다면 죄송하다). 이적, 전현무 등의 연예인과 소설가, 심리학과 교수 등이 삼국지에 대해 저마다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펼친다. 역사 강사, 연예인, 소설가, 이 얼마나 훌륭한 스토리텔러의 조합인가? 그런데 스토리의 힘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전문가는 없어도 되는 건가? 어린 시절 나름 삼국지 덕후였던 나는 비전문가들이 사실인양 이야기하는 토론에 그리 유쾌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삼국지편 역시 역사 왜곡 이슈 문제를 피하지 못했다. 최종 검토를 해주는 전문가 한 명만 출연했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팩트의 중요성은 역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정치든, 경제든, 학문이든, 전문 지식에 매몰되어서도 안되지만 무시해서도 안된다.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비전문가의 의견도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전문가가 배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스토리는 사실과 결합했을 때 진정으로 빛이 난다. 사실 없는 스토리는 그냥 '뻥'일뿐이다. 좋은 소설은 될지언정 지식으로서의 가치는 없는 것이다. 스토리뿐만이 아니다. 미래에 중요한 다른 역량들도 마찬가지다. '디자인', '조화', '공감', '유희', '의미' 역시 모두 기존에 중요시 여겼던 역량인 '분석', '논리', '계산', '전문지식'과 같은 것들과 잘 융합되어서야 비로소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정말 오랜만에 포스팅하네요. 지난주에 라식을 하고 아직 눈 회복이 안돼서 블로그는 자제하고 있습니다. 사실 눈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한량처럼 놀고 있지만요. 눈 회복을 위해 독서도 안 하고, 공부도 안 하면서 스마트폰은 하는 기적의 회복

민간요법 중입니다. 얼른 눈 회복이 다 되어서 이런 변명거리 없이 열심히 포스팅할게요! 옛날 모니터라 그런지 글을 쓰는데 눈이 더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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